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골 문자 (문단 편집) == 용례 == 고대 중국에는 거북이 껍데기에 열을 가하여 터진 금을 보고 치는 점술이 있었는데 귀복(龜卜)이라 부른다. 갑골문은 귀복을 친 결과를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건을 기록한 갑골문도 존재하지만 흔하지 않다. [[사기(역사책)|사기]](史記) 귀책열전에는 "거북이 껍질을 태워 그 징조를 살폈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실제 고고학적 결과와 일치했다. 복사가 새겨진 갑골은 구성이 좌우대칭인데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점친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올지 안 올지 점친다고 해보자. 좌측에는 '모 일에 누가 묻습니다. 비가 오겠습니까?'라는 점을 치고, 우측에는 '모 일에 누가 묻습니다. 비가 오지 않겠습니까?'라는 점을 친다. 그리고 점의 결과가 맞은 쪽에 결과를 기록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거북이 배딱지(복갑腹甲)나 등딱지(배갑背甲)[* 등딱지는 단단해서 글을 새기기 어려울뿐더러 표면이 울퉁불퉁하여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예 안 쓰인 것은 아닌데, 복갑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드물었다.]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고 균열을 낸 모습이 특징적인데, 구멍을 뚫은 것은 가열했을 때 쉽게 균열되도록 한 조치이다. 갑골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거북이 껍질과 짐승 뼈를 이용했다. 거북이는 주로 남방에서 공급되었는데 갑골문에도 남방에서 거북이를 몇 마리 바쳤다는 명문이 자주 발견된다. 짐승 뼈 중에서는 주로 소, 특히 어깨뼈(견갑골)을 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사슴 뼈와 뿔, 호랑이의 뼈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사람의 뼈를 쓰기도 하였다. 갑골에 쓰인 글에는 왕이 직접 그 결과를 판단한 복사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갑자일에 점을 쳤다. 왕이 그 결과를 보고 말했다. 사흘 뒤에 비가 내릴 것이다. 삼일 뒤에 비가 내렸다." 하는 형태로, 왕이 점복에 관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주로 [[무정(상)|무정]](武丁) 시기 기사가 많은데, 갑골문 해독 결과에 따르면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 무정 사후 조갑(祖甲)이 즉위할 때부터 제는 그저 왕의 묘호로 전략해버렸고 당연히 제에게 뜻을 묻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당시 상나라는 제(帝)라는 신을 상나라의 수호신이자 주신으로 섬기며 하늘과 자연의 뜻을 물었는데, 군사적인 주제로는 강(羌)족과 인방(人方), 주방(周方) 정벌 문제를 자주 제에게 뜻을 물었다. 특히 갑골문 기록상 주방과 갈등이 심각한데, 주방은 훗날 무력혁명으로 상나라를 전복한 그 [[주나라#s-2.1|주나라]]이다. 갑골문에 주방은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를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상나라 사람이 주방에 악감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상나라 이후 천자국이 된 주나라 또한 갑골 문자를 사용했는데, 점을 칠 때 상(商)자를 옷 의(衣)자로 기록하였다. 주나라 사람들 또한 상나라를 비하한 듯하다. 衣의 발음은 '은'으로 추정된다. 또는 상나라의 수도 은(殷)[* 상나라의 마지막 국호는 사실 은(殷)이 아니라 천읍상(天邑商)이고, 은(殷)은 도시 이름이다. 상나라는 수도를 중심으로 같은 성의 제후를 봉하였다. 같은 성의 제후에게 읍(邑)을 하사하여 군사적으로는 수도를 보호하고, 주변 이민족을 감시하였는데, 당시 받을 수(受)와 받들 봉(奉)자의 갑골문 자형으로 추정해보면 제후에게 기념수나 정교한 배를 하사한 모양이다.]을 비하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나무 가지나 거북이 껍질을 사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고 나면 이를 모두 버렸다. 한번 점을 친 것은 보관해봐야 영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점치는 직책인 복관(卜官)이 이를 소중히 여겨 보관했다. >---- >[[사기(역사책)|사기]] 귀책열전 참고로 사기에 따르면 점을 치고 버렸다고 언급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은 층층이 아래서부터 겹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상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따로 보관했다는 증거이다. 갑골문을 소홀히 여겼다면 따로 발견되어야 하므로 현 학계에서는 귀책열전의 내용이 오류라고 본다. 사실 귀책열전은 사마천의 원본이 사라져 [[저소손]]이 보충했으나, 내용이 난잡하고 가독성이 떨어지기로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